2015년 8월 2일 유나의 트윗톡톡 096 “바보 노무현을 가장 사랑한 바보 강금원”
8월 2일은 강금원 노무현재단 명예이사장의 3주기 추도식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노무현의 영원한 후원자’로 알려진 고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에 대해 알려드리려 합니다.
강금원은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만석꾼 소리를 듣던 집안이 아버지 사업 실패로 몰락한 후 가장의 역할을 하며 힘겨운 시절을 보냈다. 1975년 서울에서 창신섬유를 설립하고 1980년에 회사를 부산으로 옮기고 성공을 거둔다. 그런데도 그는 부산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호남 출신였기 때문이다.
노무현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8년이다. 당시 서울 종로에서는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있었고 강금원은 노무현 후보에게 전화한 후 계좌로 후원금을 보냈다. 2년 후 노무현 이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했는데 이때 두 사람이 처음 만났다고 한다. 민주당으로서는 정치적 불모지인 부산에서 노무현은 거듭 낙선하면서도 출마했는데, 강금원은 지역주의에 도전하는 노무현의 모습에 크게 감동했고 이후 아낌없는 후원을 했다.
출처: 사람사는 세상
자금도, 정치적 배경도 없던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은 물론 국민이었지만, 만약 강금원이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것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강금원이란 사람’ 이란 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2000년 부산 선거에서 떨어졌고 2002년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는 '장수천'(운영하던 생수 회사) 빚 때문에 파산 직전에 가 있었다. 강 회장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대통령이 아니라 파산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금원은 노무현을 도운 인연으로 두 번이나 감옥에 가게 된다. 첫 번째는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한 2003년이었고, 두 번째는 2009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기 한 달 전이었다. 첫 번째는 검찰 개혁을 요구하는 대통령과 이를 반대하는 검찰의 갈등 속에서 강금원 회장이 희생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구속도 정치보복에 가까웠는데 안타까운 것은 당시 강금원 회장이 심각한 뇌종양 환자여서 수술과 치료가 당장 필요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병보석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래서 안심했는데 다시 덜컥 구속이 되어 버렸다.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게 사업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다. 어떻든 강 회장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것이다. 이번이 두 번째다. 미안한 마음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법원의 보석 불가 판결이 나고 나흘 뒤에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서거 이틀 후 법원은 강금원 회장의 보석을 허가한다. 봉하 빈소로 찾아온 강 회장은 “내가 있었으면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텐데……” 라며 5일 동안 통곡했다고 한다. 노대통령 서거 3년이 지난 2012년 8월 2일, 강금원 회장은 뇌종양이 악화되어 노무현 대통령의 뒤를 따라가고 말았다.
출처: 사람사는 세상
바보 강금원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신 분들은 노무현 재단에서 펴낸 책, ‘강금원이란 사람’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강금원 회장이 돌아가신 후 한 일간지에는 강금원 회장을 기억하는 지인들이 전면광고를 냈는데요, 그 글을 소개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한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신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신의가 버려져 길바닥에 나뒹굴고
정의가 쓰레기통 속에 쳐박혀도
묵묵히 이를 지켜온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강금원
그의 이름은 강금원 이지만
우리는 그를 의리로 기억합니다.
양손에 신의와 정의를 힘 있게 쥐고
끝까지 친구 노무현과 함께 한 의리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를 보내드려야 합니다.
친구 노무현 곁으로 부득부득 가시겠다고 하니
울분을 달래며 보내드려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의리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진짜 사나이라 부르지만
당신은 우리 모두에게 진짜 선생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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