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2일 유나의 트윗톡톡 “YS와 노무현”
“여보, 나 좀 도와줘”
이 책은 1994년에 출판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전적 에세이입니다. 2014년 10월부터 노무현사료연구센터는 노무현사료관을 통해 이 책의 PDF파일을 무료로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보, 나 좀 도와줘” 표지(왼쪽)와 대선후보 시절 한 중학교 교사의 요청으로 학생들에게 써준 친필(사진제공=노무현사료연구센터)
이 책에는 22일 고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신 김영삼 대통령에 얽힌 인연과 3당 합당 등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책 속에 실린 글 몇 부분만을 옮겨오려고 합니다. 나머지 글이 궁금하신 분은 위 주소에서 전문을 다운 받으시기 바랍니다.
1. 영원한 보스
89년 의원직 사퇴를 했을 당시의 일이다. 당시 나는 1년 남짓한 정치판에서의 생활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한 채 혼돈의 와중에서 방황을 거듭하고 있었다.
여당의 일방적인 불참으로 파국을 맞이했던 청문회, 기대했던 것만큼 쉽게 풀려 나가지 않은 야권 통합,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 청년들과 했던 굳은 약속들, 그리고 박해받는 현장에서 항상 제3자로 남아 있어야 했던 국회의원이라는 신분,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압박하기 시작했고 나는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의원직 사퇴서를 던지고 말았다.
(중략)
그리고는 침묵이 흘렀다. YS는 한참 동안을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했다. 2분 여가 지났을까, YS는 마침내 정색을 하더니 다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본론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자리에서 사퇴를 번복하지 않으면 저 문으로 돌아 나가는 일도 쉽지도 않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설득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방어 태세를 가다듬었다.
“노 의원, 그래 얼마나 마음이 아픈가? 내 노 의원 마음 다 안다. 충분히 이해하고 말고. 우리 정치판이 너무 험해서 그렇지. 노 의원처럼 깨끗한 사람이 버텨 나갈 곳이 못되는 것 같아. 그렇게 순수한 사람들이 소신껏 일을 할 수 있는 정치가 되어야 할 텐데 말이야.”
뜻밖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의 말은 더 뜻밖이었다.
“어디 가서 좀 더 쉬게나. 낚시라도 하면서⋯⋯.”
YS의 말은 그게 전부였다. 사퇴 철회는커녕 사퇴의 ‘사’자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게다가 때 아닌 ‘낚시 비용’으로 2백만 원이 든 돈 봉투를 직접 내 손에 쥐어 주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왜 사퇴서 얘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것일까? 이 돈 봉투는 받아도 되는 것일까? 온갖 의문들과 당혹감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으면서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부하를 다스리는 데는 도가 통한 사람이었다.
2. ‘침묵으로 말하는 정치9단’ 중에서
부산에서 학교를 다닐 무렵, YS는 나를 포함한 내 또래의 친구들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20대에 국회의원이 된 사람, 단순한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무슨 전설이나 신화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이었다.
그 후 조금 더 세상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그런 이미지도 현실적인 것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불의한 독재와 맞서 싸우는 우리의 투사’가 된 것이다. 그런 이미지 속에는 월드컵 축구에 참가한 우리 선수들을 향해 열심히 박수를 치는 국민들의 심정과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아무튼 YS는 그 무렵 ‘김빵삼’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많은 부산 사람들로부터 큰 호감을 얻고 있었다. 그런 부산 사람들의 정서로 말하면 나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79년의 일로 기억되는데, 친구의 권유로 ‘팔각회’라는 모임에 나간 적이 있었다. YS의 ‘민주 제단에 피를 뿌리겠다.’는 발언이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을 때였다.
그 모임에서 경찰서 정보과장이라는 사람을 강사로 초빙하여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무슨 민방위 훈련이나 예비군 훈련을 하기라도 하듯이 한참 동안 남침 위기에 대해 지루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이런 시기에 민주 제단에 피를 뿌리겠다는, 이런 과격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에 피를 뿌리겠다는 겁니까. 이런 철부지가 정치 지도자가 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면서 느닷없이 YS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나는 울화가 치밀어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었지만 친구의 얼굴을 보아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두 번 다시 그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나의 ‘영웅’, 아니 ‘우리의 영웅’인 YS가 매도당하는 것만큼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영웅’에 대한 열렬한 호감과 존경심은 한 순간에 와르르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87년의 양 김 분열이 거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3. 빌린 머리와 돈 봉투
그럼에도 나는 그를 지도자로 부르는데 아직 동의를 할 수 없다. 그로 말미암아 청산해야 할 이 땅의 기회주의가 다시 때를 만났기 때문이다.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즉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
YS가 3당 합당으로 권력을 잡기 전만 해도 이 땅에서는 기회주의자들이 차지할 수 있는 장물의 수준은 한정되어 있었다. 고작해야 권력에 빌붙어 먹고사는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YS의 대권 장악과 함께 기회주의자들의 입지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다. 기회주의자들의 성공이 최고 권력의 차원으로까지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YS의 대권 장악은 기회주의자들에게는 하나의 신선한 모델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4. 45의 트로이 목마
어쨌든 나와 YS는 갈라섰다. 그 이후 나는 변함없이 YS를 변절자라고 비난하고 다녔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YS가 민자당 후보가 되면 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고 막말도 했다. 그 말은 내 나름대로 상식과 과학적인 추리를 거쳐 얻은 결론이지만, 배가 아파서 했던 말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대통령이 되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거나, 트로이의 목마라는 이야기도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호랑이 잡겠다고 큰소리 쳐 놓고는, 오히려 호랑이의 양자가 되어 호랑이 굴을 상속받아 여전히 동네의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다.
5. 또 하나의 시작(1988년 초선이 된 뒤 4년 뒤 이야기)
처음부터 안되는 선거였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 모두 부산 출마를 말렸다. 그러나 김정길 의원과 나는, 그래도 부산을 떠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우리 당의 간부들은 ‘야당 복원’ ‘통합 야당’을 외치며 우리의 등을 떠밀었다.
선거를 치르기 위해 부산에 내려온 나는 정말로 눈앞이 깜깜했다. 3당 합당 덕분에 중진 아닌 중진이 되어 야권 통합이나 하면서 중앙 정치를 한답시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지난 4년 동안 지역을 거의 돌보지 못한 탓에, 지역구는 황폐해 있었다. 그렇게 들뜬 분위기의 한가운데로 김대중 씨가 대표로 있는 당의 대변인이 뛰어들어 선거를 치르겠다고 했으니⋯⋯. 표가 보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 마당까지 와서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그런데 정치는 마약과도 같다고 하더니, 막상 선거전이 시작되면서 뜻밖에도 분위기가 달라지는 듯했다. 유권자들이 무척이나 반가워해주는 것을 보고, 잘하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기분도 들었다. 은근히 용기도 생기고 욕심도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유권자들이 나를 반겨 준 것은 나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단지 내가 유명인이기 때문이었다. 지역 개발을 하라고 국회의원을 뽑는 것이 아니며 또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국회의원이 지역 개발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며 열심히 ‘지역개발론’을 공격했으나, 허삼수 씨가 그 동안 골목골목을 누비며 엮어 놓은 끈끈한 관계를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낙선의 근본적인 원인은 ‘노무현이를 밀어주면 DJ가 대통령 된다. YS를 대통령으로 만들려면 미워도 허삼수를 찍어야 한다. 이번엔 후보 보고 찍는 게 아니다.’라는 부산 사람들의 의식에 있었다. 사실 그 한마디로 선거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선거는 YS가 좌천동 증산 공원에 들러 허삼수 씨의 손을 번쩍 드는 것으로 이미 끝나 버린 것이다.
출처: 한겨레신문